[상담사역의 중요성.]
기독교 상담의 가장 큰 의미는 상담은 교회 사역 중 가장 중요한 사역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 복음을 전하는 수단으로 그리고 방법으로 교회는 ‘상담’을 실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주님은 성령님은 ‘상담자’이시고 ‘상담사역을 명하셨기기 때문이다.
사람을 전도하는것부터 시작하여 그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장하기 까지 전 과정에서 기독교 상담은 접목되고 상담으로 마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중요한 부분으로써 주님께서 “성령”에 대해서(요한복음16장)말씀을 하셨는데, 우리는 ‘성령의 역사’라 하여, 기적으로 몸이 고침을 받는‘몸 고침’을 강조한다.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마디로 ‘보혜사’란 "상담자(Counselor)"를 의미한다. 요16:7“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에서 보혜사를 영어 성경 NIV버전에서는 The Counselor(상담자)로 KJV 버전에서는 The Comforter(위로자)로 번역하고 있다. 또한 성령을 “진리의 영:The Holy Spirit=The Spirit of Truth”(요14:16;16:13)이라고 하는데, 성령은 진리 그 자체로서 자기 자녀들을 인도하실 때 “상담적 방법”을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상담:consultation, counsel)’라는 말은 원래 법적 용어 정치와 군사적 용어로 서양에서 사용되어 왔다. 특히 영국 왕실이 고문 자격자를 맡거나, 법적인 상황에서는 ‘변호인’을 두고 사용하였다. 특히 전시에는 전략 과 전술에 능한 사람을 일컬어 말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탄생 예언부터 "위대한 상담자"(Wonderful Counselor)로 명명하고 있다.다만 한글성경은 이것을 밝히지 않고 있는데,아마도 번역당시,'Counseling'&'counselor'라는 고급단어의 이해력과 적당한 번역어가 들어나지 않아, 기묘자,묘사,라는 말을 사용한듯 하다. 그 만큼 상담은 고급사역인것이며, 성경적 사역이다. '상담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본 사역이었던 것이다. (NIV:Lsaiah9:9/사9:6)
보혜사를 히브리어로"παραχλητος(파라클레토스:겉에)라는 뜻과 “παρα”(파라:부름받은)뜻의 χλητος(클레토스 :겉에서 돕기 위해 부름 받은 자)라는 뜻을 갖고 있다. ,
성령께서는 이러한 모든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방법으로 우리들을 인도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그렇게 인도 하셨기 때문에, 성령을 따르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호크마 주석(요14:16)에도 같은 의미로 주석하고 있다.1) 그래서 혹자는 설교 할 때 성령을 “Helper:돕는자" 라고 말을 한다. 상담의 목적은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4). FE-Toil 상담기법의 성경적 의미.
느낌과 감정으로 모든 상담을 대할 때 내담자의 여러 문제들을 회복시킬 수 있을까? 답은 가능하다. 물론 모든 상담이 완결로서 끝날 수 없다. 다만 내담자에게 느낌과 감정의 회복으로 얼마든지 치유될 수 있다. 내적 치유가 의학적인 신경체계와 깊은 관련이 있다. 즉, 아픔과 상처, 혹은 고통에 대한 느낌과 감정은 내적인 문제, 갈등의 표현이다. 이것을 치유하는 것을 '위로’라고 말할 수 할 있다. 성령의 도우심은 바로 이 위로를 주시는 것이다. 이 위로를 받을 때 모든 인간은 행복하다!, 기쁨다!라고 고백한다. 이것이 성령의 최종적 사역이시다.요16:20-24에 보면 이 기쁨의 역사를 약속하고 있다.“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세상이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참된 기쁨은 참된 회복, 참된 위로에서 나오는 것이다. 진리의 영이 우리 겉에서 상담하는 것은 우리의 느낌과 감정이 회복되길 바라시는 것이다.
끝으로 데이빗 A 씨맨즈는 말하기를 “모든 사람의 느낌과 감정은 나무속의 나이테와 같다.(David A. Seamands)
:Healing for Damaged Emotions) 나무의 나이테 속에는 전문가가 보았을 때 언제 홍수가 있었는지. 가뭄이 있었는지, 추운 겨울이었는지의 기억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우리의 잘못된 관념이라고 할까? 생각이라고 할까? 흔히 ‘성령충만’ 받으면, ‘은혜 받으면’사람들의 내적인 아픔이나, 느낌과 감정의 부분까지 자동으로 해결된다고 믿는다. 믿는 것은 좋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예수를 영접하고, 성령의 충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평생에 중요한 사건이요, 귀중한 은혜의 사건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감정적인 부분, 느낌에서 받은 상처까지 모두 회복되었다고 볼 수 없다. 한 예로, 암 환자가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새 생명을 찾았다고 가정하자, 그렇다고 그 사람의 건강이 모두 회복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건강의 기회를 찾은 것이다. 거기서부터 이 암 환자는 식생활,가정생활, 신앙생활, 직장생활, 사회생활,인간관계 등등에서 조심할 부분들을 찾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은혜를 받았고, 성령충만을 받았다면, 그 이후의 생활을 좀 더 조심스럽게, 성숙하게 해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극단적으로 자신의 체험을 강조하며, 그렇지 못한 사람을 비교하여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는 행위 등을 조심해야 한다.
상한부분은 영혼이거나, 마음이 아니다. 그리고 총괄적인 의미에서 내적인 세계가 아니다. 이 개념은 너무나 현실감이 떨어진다. 느낌과 감정의 치유가 시급하다. 이것이 위치한 것이 의학적으로 신경계요! 내적 세계이다. 사단은 바로 이 내적 세계에 자리한 예민한 소중체인 느낌과 감정을 파괴, 혹은 상처를 입혀 스스로를 좌절하게 하고, 의욕과 소망을 마비시킨다. 그리고 악이라는 바이러스(흔히 스트레스 증후군;별도로 기록)를 도구로 삼아 다른 이들을 공격하여 사단의 계획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다.
열등감, 자존심은 바로 느낌과 감정이 치유되지 못한 부분에서 나온 내적인 ‘암’ 이다.
히브리서4:15절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 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KJV 버전에서“For we have not an high priest which cannot be touched with the feeling of our infirmities ; but was in all points tempted like as we are, yet without sin .”(NIV:위 ...who is unable to sympathize with our weaknesses,:누가 우리의 연약함을 위로할 수...)2)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셨다. 연약할 때 우리는 죄를 짓게 된다. 그 이유는 죄와 싸울 능력과 지혜, 그리고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리의 연약함을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불구의 상태에서 오는 모든 무시무시한 감정 일체를 다 경험하신다.3) 주님은 심한통곡도 눈물로 아셨고, 통곡하며 간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는 분이시다.4) (마26;37-38)
이제 상담자 예수께서 성령을 통하여 연학한 심령들을 위로하고 치유,회복시키시기 위해서 진리로써 상담을 진행해 나아가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진실한 그리고 충실한 고백이 들려질 때 사람들은 회복되고, 위로 받을 것이다. 여기서 내적인 변화와 회복을 위해 과거의 아픔과 연약함 모두를 거짓 없이 충실히 아뢰는 일은 당신 몫이다. 정확한 진단은 당신을 진단하는 자를 믿는 믿음과 솔직한 병명을 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남아프리카(Grahamstown)성 바울 신학대학장인 던컨 부케넌(Duncan Buchanan)는 기독교 상담 사역에 대해서 “개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회복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5)
부캐넌는 “사람에게 있어 분노는 일반적인 것이다. 특별히 이(남아프리카) 나라에서는 분노가 거의 일상화되었다. 분노의 한 표현은 폭력이다.”라고 언급하였다.
오늘날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많은 아픔과 상처를 주거나 받고 살아간다. 상처는 분명 아픔을 동반한다. 더 나아가 그 상처가 씻을 수 없는 듯한 영혼 깊은 곳에 있거나, 큰 상처일 경우 가정과 사회에서 관계성을 잃게 되고, 결국 마음속에 남모르게 ‘분노’를 갖고 살게 되다. 육체의 상처는 시간에 따라 아물게 된다. 그러나 영혼의 상처는 스스로 아물질 않는다. 다만 잊고 있거나, 영혼 깊이 묻어두고 있을 뿐이다.
과연 영혼의 상처는 무엇인가? 앞서 말했듯이 Feeling과 Emotion 이 관계된 아픔인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이러한 아픔을 회복시키기 위해 오셨다. 사람들이 FE-Toil(works)에 충실 할 때 비로소 영혼이 회복된다. 그리고 기쁨을 얻게 된다. 우리의 기쁨은 주님이 주시는 참 기쁨 이다.그 기쁨은 느낌(Feeling)과 감정(Emotion)이 회복될 때 구원의 기쁨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구원을 받았다 해도 교회생활에 기쁨이 없고, 가정에서 우울하고 할 수 없이 밥하고 밥 먹고 직장 생활하는 것은 모두다 FE가 상실되거나 무너졌기 때문이다.
어떤 상처라도 FE이 관여하지 않는 구석이 없다. 반대로, 사람의 FE이 회복된다면 어떤 아픔과 상처도 치유되지 않는 것이 없다.
한번 생각해보자 주일날 은혜 받아야 할 주일 예배에 당신의 Feeling(느낌)과 Emotion(감정)이 상해 있다면 말씀에 은혜가 되던가요? 아마 형식적인 인사 ,만남, 식사, 찬송, 예배이지 않겠는가? 이 역시 FE가 회복되었다면 모든 것이 은혜롭고 기쁠 것이다. 주님은 보혜사 성령을 보내심이 바로 이 참된 기쁨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약속하시고 말씀하셨다. “ And ye now therefore have sorrow : but I will see you again , and your heart shall rejoice , and your joy no man taketh from you . And in that day ye shall ask me nothing . Verily , verily , I say unto you , Whatsoever ye shall ask the Father in my name , he will give it you .Hitherto have ye asked nothing in my name : ask , and ye shall receive , that your joy may be full .(John16:22-24 KJV)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2-24)
물론 이 말씀은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신다는 약속이 전제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참 된 기쁨도 성령에 의해서만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성령에 의해서만 이러한 기쁨이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참된 기쁨은 사람들의 FE가 회복될 때 가능하며, 그 회복은 성령이 “Counselor"(But I tell you the truth It is for your good that I am going away. Unless I go away, the Counselor will not come to you; but if I go, I will send him to you.:John:16:7(NIV))라는 사실을 먼저 알고 믿어야 한다. 그 분이 우리의 세심한 그리고 예민한 부분, 또한 깊은 곳의 상처까지 다 회복시키시고 치유하시는 유일한 분이신 것이다.요한 16장7절의 말씀은 이런 점에서 상담학적으로 너무나 중요한 말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