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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베네딕토 16세의 발언에 대해서....개신교 입장은?

by Louis911 2007. 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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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 공식발언"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가톨릭 교회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교회”라며 개신교와 동방정교, 성공회의 신앙을 부정하는 발언에 대한 간략한 논고.

 기독교는 유일하게 "카톨릭" 이라고 ..당신들의 과거의 범죄로 성경대로 돌아간 "개신교"는 그럼 무슨 교인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아래 모든 이들은 평등하고 주님역시 하늘의 보좌를 버려 두고시고 이 땅에 인간을 구원하시려 오셨다. 교황의 권위는 어느 정도 인가?  교황의 부패한 권력남용과 카톨릭 부정부패로 종교 개혁자(루터와 칼뱅(아래참조)들이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개혁을 감행한 것이다. 물론 오늘날 개신교도 담임목사의 권력과 권위를 독단하는 것은 옳치않다. 한국 교회가 바로 세워야 한다. 건강한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을 사사로이 풀지 않고 증거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한다면 종들이 권력과 권세(?)를 갖고 말을 함부로하고, 인간적 욕심으로 거룩한 말씀과 그 무리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은 가장 큰 부패이다.  

성경/요한복음3장:36절"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마가복음 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출애굽기 20:4"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

                            는 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로마서 8: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

베드로후서1:19-21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

                      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다음은 백과사전(Daum)에 기록된 지금의 개신교(장로교/감리교./침례교/등등)가 로마 카톨릭에서 어떻게 출현하게되었는가에 대해서 첨부한다.

16세기 서방 교회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일어난 종교혁명.

이 혁명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는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이다. 광범위한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영향을 미친 종교개혁은 그리스도교의 3가지 주요분파 중 하나인 개신교를 세우는 기초가 되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출현한 중세 후기의 가톨릭 세계는 복잡했다. 여러 세기 동안 교회, 특히 교황청은 서유럽의 정치생활에 깊이 관여했다(→ 교황제). 늘어나는 교회의 권력 및 부와 결탁하여 발생한 음모와 정치 공작은 영적 세력인 교회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면죄부(또는 영적인 특권)와 성물 판매, 성직자들의 타락으로 인해 경건한 자들이 착취당하고 교회의 영적인 권위가 와해되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그 이전에도 이미 선례가 있었다. 성 프란키스쿠스, 페터 발도, 얀 후스, 존 위클리프 같은 중세 교회 내의 개혁자들은 이미 1517년 이전에 수세기에 걸친 교회생활의 악습을 폭로했다. 16세기의 위대한 인문주의 학자인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는 교회에 만연된 미신과 도덕적 악습을 공격하고 최고의 교사인 그리스도를 모방하라고 촉구한 자유주의 가톨릭 개혁의 주요 주창자였다. 이 개혁운동은 전통적으로 종교개혁이 시작한 날로 여기는 모든 성인의 날 전야, 즉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의 모든 성인의 교회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이기 전에도 여러 해 동안 교회 내부 개혁을 위한 지속적인 관심을 표명해왔다.

마르틴 루터는 그 자신과 과거의 개혁자들은 분명히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교회 생활의 타락을 공격한 반면, 자신은 모든 문제의 신학적 근원인 구원은총에 관한 교회의 교리를 공격했다는 것이다. 비텐베르크대학교의 주임사제이자 교수였던 루터는 면죄부와 선행의 복잡한 체계에 하느님의 가없는 은총의 선물이 얽매어졌음을 개탄했고, 95개조 반박문에서 교황은 연옥에 관한 권한이 없고, 성인의 공덕에 관한 교리는 복음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면죄부 체계를 공격했다. 이것이 교회의 윤리적·신학적 개혁에 대한 루터의 핵심적 관심사이다. 즉 성서만이 권위가 있고(sola sciptura), 의인(義認)은 선행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sola fide)는 것이다. 그는 가톨릭 교회와의 단절을 의도하지 않았지만, 교황권과 곧 충돌하게 되었다. 1521년 루터는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심문을 받고 결국 파문당했다. 내적인 개혁운동으로서 시작한 것이 서구 그리스도교의 분열을 초래한 것이다.

독일에서 일어난 종교개혁 운동은 즉시 다양하게 분화되었고, 루터와 상관없이 다른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훌트리히 츠빙글리는 하느님께 봉사할 목적으로 교회와 국가를 연합하여 취리히에서 그리스도교 신정정치를 실행했다. 츠빙글리는 의인론(義認論 : 믿음으로 의롭게 됨)의 핵심에 관해서는 루터에 동의했지만, 성찬식에 관해서는 보다 급진적인 입장을 취했다. 루터는 성찬식 때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가톨릭 교회의 화체설(化體說)을 거부했다. 루터의 공체설(共體說)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모든 곳에 편재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은 모든 요소에 물질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루터는 성찬식이 수령자들에 의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기념이고 믿음의 선포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 츠빙글리만큼 급진적 입장을 취하지는 않았다.

츠빙글리를 중심으로 한 집단으로부터 그보다 더 급진적인 집단이 출현했다. 종교개혁 좌파라고 일컬어지는 급진적인 개혁자들은 성서의 권위라는 원리는 타협없이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성서적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아세례 문제를 놓고 츠빙글리와 결별했고, 유아세례를 받은 성인은 재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재세례파'라는 별명이 붙었다. 스위스 재세례파는 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본보기를 따르고자 했으므로 칼로 맹세하거나 무기를 소지하는 것을 거부했고, 교회와 국가의 엄격한 분리를 주장했으며, 훈련받은 중생(重生)의 삶으로 세계와 구별되는 성인(成人) 신자들의 보이는 교회를 주장했다(→ 세례).

또하나의 중요한 프로테스탄티즘 형태(1529년에 열린 슈파이어 제국의회에서 로마 가톨릭에 '저항'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는 칼뱅의 이름을 딴 칼뱅주의이다. 프랑스의 변호사였던 칼뱅은 프로테스탄트 원리로 개종한 뒤 프랑스를 탈주했다. 1536년 바젤에서 그는 〈그리스도교 강요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초판을 출판했다. 이 책은 새로운 개혁운동을 포괄적·조직적·신학적으로 다룬 최초의 논거였다. 칼뱅은 의인론에 관한 루터의 가르침에 동의했지만, 루터가 율법과 복음을 날카롭게 구별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던 것과는 달리,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율법의 보다 긍정적인 역할을 발견했다. 칼뱅은 선택된 자들의 훈련된 공동체라는 자신의 이념을 제네바에서 실험할 수 있었다. 칼뱅의 강력한 지도 아래 교회와 국가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연합했다.

종교개혁은 16세기가 진행되는 동안 다른 유럽 대륙으로 확산되어갔다. 16세기 중엽 루터주의는 북유럽을 지배했고, 동유럽은 보다 급진적인 다양한 프로테스탄티즘의 온상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왕이 약하고, 귀족은 강했으며, 도시의 수효가 적은데다 종교 다원주의가 오랫동안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반(反)종교개혁의 주요중심지였으므로 거기서 프로테스탄티즘은 강력한 발판을 마련할 수 없었다. 잉글랜드 종교개혁은 종교적 원인보다는 정치적 원인 때문에 일어났다(→ 영국사). 헨리 8세는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자신의 이혼을 승인하지 않자 격분하여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고 1534년 왕을 수장으로 하는 영국성공회를 수립했다. 헨리가 단행한 교회의 재조직은 정치적 함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 종교개혁을 촉발했는데, 이 개혁에는 영어 전례서인 〈성공회 기도서 The Book of Common Prayer〉의 준비가 포함되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존 녹스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영구적인 연합을 가능하게 한 장로교의 설립을 이끌었는데, 녹스는 제네바에서 칼뱅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미국장로교회). 각 나라 종교개혁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개신교' 항목 참조.
 
종교개혁에 대해서(다음은 종교개혁에 대한 설명이다.)
 

루터의 종교개혁

  독일 종교개혁운동의 횃불은 1517년 10월 31일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수도사이면서 신학교수인 루터가 <면죄부(免罪符) 에 관한 95개조 논제>의 항의문을 비텐베르크대학의 성(城)교회 정문에 게시함으로써 올려졌다. 이 항의문은 마인츠의 대주교(大主敎) 교회의 알브레히트가 재정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판 면죄부에 대해 루터가 그 성사적(聖事的) 효과를 신학적으로 문제삼은 것이었다. 이것이 루터 자신의 예상을 넘어 유럽 전체에 파급되는 대운동으로 발전한 것이다.

  루터가 이와 같이 가톨릭교회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교리를 근본적으로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4,5년 전 그가 수도원 생활의 악전고투 속에서 바울로의 ‘하느님의 뜻’이라는 복음을 재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는 인간의 영혼 구원이란 인간의 선행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만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확신하기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종교개혁의 가장 깊은 근원은 구원문의 정확성을 둘러싼 루터의 내적 싸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95개조 논제>는 경제적으로 로마에 의해 많은 수탈을 당하여 온 독일 국민의 지지를 얻게 됨으로써, 문제가 일개 수도사가 제기한 신학논쟁에서 독일 국민 전체의 정치적 ·경제적인 문제로 확산되어 갔다. 당초 교황 레오 10세는 이 문제를 경시하였다가 문제의 해결이 어렵게 되자 유화책을 강구하기도 하였으나 루터는 1519년의 J.에크와의 라이프치히 논쟁 때 결정적으로 가톨릭교회와 정면대결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이 논쟁에서 루터는 보헤미아의 후스를 본떠 교황과 교회회의의 가류성(可謬性)을 주장하고 그 권위의 절대성을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1520년 6월 드디어 루터에 대한 파문(破門)이 단행되었다.

  이어 1521년에 루터는 보름스 국회에 소환되어 황제의 심문을 받았는데, 여기에서도 그는 자신의 신앙을 관철하였다. 그는 심문을 받고 돌아가다 작센의 선제후(選帝侯:중세 독일, 곧 신성로마제국의 제후 가운데 황제의 선거에 관여할 수 있었던 7명의 제후) 프리드리히 현공(賢公)의 호의로 바르트부르크성(城)에 보호되어 1년에 걸친 체재 중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였다. 이 루터역 성서는 문학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여 독일 국민의 정신적 유산이 되었다.

  이처럼 루터의 종교개혁 핵심은 교회개혁에서부터 시작된다. 첫째로 교회 예배의식(儀式)이 크게 달라졌다. 성직자 중심의 예배로부터 예배자 모두가 참여하는 예배로,의전(儀典)중심의 예배로부터 ‘말씀’ 중심의 예배로 변했다. 중세 가톨릭교회의 예배는 성직자 중심의 예배였다. 예배는 라틴어로 진행됐고 성직자 외에는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진행된 예배에서 회중은 방관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교회에서 성경은 성직자만이 읽을 수 있는 책이었고 성만찬에서 일반 신도들은 떡만 받고 포도주 잔은 받을 수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뜻하는 포도주를 실수로 흘려서는 안된다는 구실이었지만 사제들의 특권의식이 근저에 깔려 있었다.  

  루터는 이러한 모든 관행에 종지부를 찍었다. 예배는 모든 독일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독일어로 진행하게 했고 따라서 예배자들은 오랫동안 막혔던 귀가 열리게 됐다. 성만찬에서 모든 예배자는 떡과 잔을 받게 됐다. 루터는 또한 찬송가를 직접 작사?작곡해서 모든 예배자가 한목소리로 찬양하게 했다. 모두 참여자가 되어 예배는 활기가 넘쳤고 교회에는 신선한 새 바람이 불게 됐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루터는 ‘하나님 말씀의 선포’를 예배의 중심에 놓았다. 하나님 말씀은 생명력이 있는 살아있는 말씀이요,하나님의 말씀은 ‘설교’를 통해서 선포된다고 루터는 주장했다. 따라서 당시까지 틀에 짜인 정형화된 의전 중심의 예배로부터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 중심의 예배로 바뀌게 됐다. ‘하나님 말씀의 선포’를 강조했던 루터는 그 자신이 위대한 설교가였다. 그는 평생토록 비텐베르크 교회 강단에서 2000차례 이상 정기적으로 설교했다.

  루터의 교회개혁은 이런 외형적 변화와 함께 성경을 모든 크리스천이 읽을 수 있는 ‘열린 성경’으로 만들어준 것이다. 루터 이전까지 성경은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었고 일반 크리스천들에게는 접근하기조차 어려운 ‘닫힌 책’이었다. 우선 인쇄술이 발달하기 이전 ‘필사본’ 성경시대에 성경은 보통사람들이 살 엄두도 낼 수 없는 고가품이었다.  인쇄술이 발달된 이후에도 인쇄된 성경책은 일반인들이 읽을 수 없는 라틴어 성경이었다. ‘만인 제사장’을 주장했던 루터는 모든 크리스천은 성경을 읽어야 하고,성경을 공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루터는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주신 또 하나의 사명이라고 믿었다.  사실 루터가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기 이전에도 독일어 성경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미 13세기에 독일어로 성경이 번역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독일어 성경은 전혀 보급되지 않았다. 번역도 난해할 뿐 아니라 가톨릭교회 지도자들은 독일에서 독일어 성경을 인쇄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시켰다. 독일어는 성경의 오묘한 진리를 드러내는 데 부적합한 언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루터는 독일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독일어 성경을 번역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번역작업은 전혀 예기치 않았던 시기에 예상치 못했던 장소에서 시작됐다.  1521년 독일 황제 카를 5세는 루터를 범죄자로 정죄하는 ‘보름스 칙령’을 선포했고 루터는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됐다. 이때 작센주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납치극’을 벌여 루터를 그의 영지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채로 피신시켰다. 루터는 이 성채에서 가명을 쓰고 머리와 수염을 길게 길러 변장을 한 채 10개월 동안 도피생활을 했다. 이 기간은 루터에게는 시련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실은 하나님의 은총의 시간이었다. 루터가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은 바로 이 기간이었다. 은둔생활이었기 때문에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그는 성경번역에만 집중했고 12주만에 신약성경 전체를 번역할 수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수난의 시간에 하나님은 루터에게 초인적인 능력을 부어주신 것이다.

  루터의 번역은 딱딱하고 난해한 축자적 번역이 아니었다. 누구나 읽어서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한 번역이었고 생동감이 넘치는 유려한 문체였다. 성경 번역에서 루터는 상당히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1장 28절에는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는 장면이 있다. 당시 유럽세계가 사용하던 라틴어 성경은 천사가 마리아를 부를 때 ‘은혜가 넘치는 자여’(gratia plena)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독일 사람들에게 ‘넘친다’는 말은 그들이 즐겨 마시는 맥주잔에 ‘맥주가 넘친다’는 것을 연상시키는 말이었다. 루터는 라틴어 성경을 따르지 않고 ‘은혜를 크게 받은 자여’holdselige)라고 번역했다. 이런 것을 보면 루터가 성경말씀 한 자 한 자를 얼마나 심사숙고하며 세심하게 번역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 머물고 있던 사이에 비텐베르크에서는 1521년 카를슈타트(본명은 Andreas Bondenstein)가 지도하고 있던 과격분자들이 급격한 혁신운동으로 이른바 ‘비텐베르크소요’를 일으키고 있었다. 미사의 폐지, 평신도에 대한 성배(聖杯) 부여, 성상(聖像) 파괴 등은 개혁운동의 논리적 귀결이라 하나, 원래 보수적이었던 루터는 이를 급속하게 실행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이 소요는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서 돌아온 뒤 진정되었지만 그 여파는 1522년의 ‘기사(騎士)의 난’ 농민전쟁(1524∼25)으로 발전하였다. 이 무렵부터 개혁운동은 제2단계에 들어가 루터는 한편으로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싸우면서, 한편으로는 재세례파(再洗禮派)와 싸우는 양면작전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그는 에라스무스와의 ‘자유 의지론’을 둘러싼 논쟁을 통해 인문주의와도 결별을 하여야만 되었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국민일보> 2005년 3월 29일 [종교개혁,그 발자취를 따라(19)] 마르틴 루터 종교개혁의 승리(1555년)②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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